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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규 (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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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규는 고려 초의 호족으로, 본래 양근 함씨였으나 고려 태조에게 왕씨 성을 사성받았다. 그는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여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대광의 자리에 올랐다. 태조의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외척이 되었으나, 혜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반역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다. '왕규의 난'으로 알려진 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정종과 광종의 음모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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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규 (함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함규
한자 이름咸規
로마자 표기Ham Gyu
직위
직책대광(大匡)
임기942년 ~ 945년
군주고려 태조, 혜종
가족 관계
친인척광주원군 (외손자)
사망 정보
사망일945년

2. 생애

고려 초기 광주의 대호족 출신으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다.[1][2][3] 937년 후진 고조에게 축하 사절로 파견되었고, 943년 재신(宰臣)에 올랐다. 왕규는 두 딸을 태조에게 바쳐 왕실의 외척이 되었고, 혜종을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사』의 "반역전"에 따르면, 혜종과 그의 이복 동생들인 정종과 광종을 이간질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혜종을 암살하려 했다고 한다. 945년 혜종이 위독해지자, 정종은 왕식렴의 군대를 동원하여 왕규를 강화도 갑곶으로 유배보내 살해했다.

2. 1. 가계와 출신

고려 초기 광주의 대호족으로, 본래 성씨는 양근 함씨였다. 태조에게 왕씨 성을 사성받아 왕규(王規)가 되었다.[1][2][3] 함규는 당시 양근을 포함한 광주목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앞장서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 등의 작위를 받았다. 중부의 강력한 호족이었던 함규는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광(大匡)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왕규는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었으나 혜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의 난인 왕규의 난으로 처형되었다.

2. 2. 관직 생활과 왕실과의 관계

고려 초기 광주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태조에게 왕씨 성을 사성받아 왕규(王規)가 되었다.[1][2][3] 함규는 당시 양근을 포함한 광주목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앞장서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 등의 작위를 받았다. 중부의 강력한 호족이었던 함규는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광(大匡)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었다.[1]

경기도광주의 대호족 출신으로, 태조 왕건의 건국을 도왔다. 937년에 후진 고조의 축하 사절로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943년에는 재신(宰臣)에 올랐다.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왕씨(개성 왕씨) 성을 하사받았다.[1]

2. 3. 왕규의 난과 죽음

혜종이 위독해지자, 945년, 정종은 서경의 왕식렴 군대를 동원하여 왕규(함규)를 강화도 갑곶에 유배하여 살해했다.[1][2][3]

『고려사』의 "반역전"에 따르면, 왕규는 혜종과 이복 동생인 정종, 광종을 이간질하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혜종 암살을 꾀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혜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의 난인 왕규의 난(王規之亂)으로, 왕규는 이 난으로 처형되었다.

왕규의 자손은 함씨로 복성했으며, 함순 등이 있다.

3. 가계

이름관계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왕씨
후광주원부인 왕씨
태조 신성대왕사위
광주원군외손자
혜종사위


4. 평가 및 의혹

왕규는 경기도광주의 대호족 출신으로, 태조 왕건의 건국을 도왔다. 937년에 후진고조의 축하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943년에는 재신(宰臣)에 올랐다. 그는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왕씨(개성 왕씨) 성을 하사받았고, 혜종을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았다. 왕규의 자손은 함씨로 복성했으며, 함순 등이 있다.

4. 1. 엇갈리는 평가

왕규는 군사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으며, 그의 손자인 광주원군은 왕위 계승 서열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왕규가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본다.[1] 오히려 이 사건을 왕위를 노린 정종과 광종의 음모로 보고 “왕규의 난”이 아닌 “왕식렴의 난”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고려사』의 "반역전"에 따르면, 왕규는 혜종과 이복 동생인 정종, 광종을 이간질하여, 외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옹립할 목적으로 혜종의 암살을 꾀했다고 한다. 혜종이 위독해지자, 945년 정종은 서경의 왕식렴의 군대를 동원하여 함규(왕규)를 강화도 갑곶에 유배하여 살해했다고 전해진다.[1]

4. 2. 왕식렴의 난?

왕규는 군사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으며, 그의 손자인 광주원군은 왕위 계승 서열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왕규가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본다. 오히려 이 사건을 왕위를 노린 정종과 광종의 음모로 보고 “왕규의 난”이 아닌 “왕식렴의 난”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왕규는 경기도광주의 대호족 출신으로, 태조 왕건의 건국을 도왔다. 937년에 후진고조의 축하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943년에는 재신(宰臣)에 올랐다. 그는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왕씨(개성 왕씨) 성을 하사받았고, 혜종을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사』의 "반역전"에 따르면, 왕규는 혜종과 이복 동생인 정종, 광종을 이간질하여, 외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옹립할 목적으로 혜종의 암살을 꾀했다고 한다. 혜종이 위독해지자, 945년, 정종은 서경의 왕식렴의 군대를 동원하여 함규(왕규)를 강화도 갑곶에 유배하여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왕규의 자손은 함씨로 복성했으며, 함순 등이 있다.

5. 기타

왕규는 함규라고도 불린다.

5. 1. 후손

자손은 함씨로 복성했으며, 함순 등이 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한국사 12 -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국사편찬위원회
[2]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3] 웹사이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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